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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왕자>(원작 '어린왕자, 생떽쥐베리 작')
#학교_패러디문학관


얼마 전에 사하라 사막같은 교무실에서 업무관리 문서창이 고장을 일으킬 때까지 나는 마음을 털어놓고 한서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를 갖지 못한채 홀로 살아왔다.


내 공인인증서의 어딘가 오류가 나버린 것이다. 교무부도 정보부도 책임이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서 어려운 재발급을 시도해 보려는 채비를 갖추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퇴근을 하느냐 야근을 하느냐의 문제였다. 생기부 마감까지 며칠 남아 있지 않았다.

첫날밤 나는 따스한 밥이 있는 집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교무실에서 야근을 했다. 시베리아 허스키가 끌고 가던 썰매를 타다 개들이 미쳐 날뛰어 썰매 위에 혼자 남게된 개주인보다 더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네이스가 이제야 열릴 즈음 무렵, 야릇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말했다.

"업무 하나를 더 맡아줘."

"뭐라구?"

"업무 하나를 더 맡아줘."


나는 기겁을 해서 후다닥 네이스 창을 닫고 일어섰다. 귀를 막 비벼보았다. 사방을 잘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이상하게 덩치가 큰 정장 어른이 나를 똥꼬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훗날 내가 만난 왕갑 관료들 중에서 가장 초롱초롱한 눈빛이 여기있다.

그러나 물론 나의 푸념보다 왕갑 관료의 지령은 훨씬 더 막무가내였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임용 후 몇해 마에 선배들이 학교한테 책임 떠넘길 일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나를 낙심시켰기 때문에 나는 속이 보이지 않거나 보이거나 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을 떠넘기는 관청의 요구에 아무런 적응도 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 왕갑의 느닷없는 출현에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퇴근해야할 집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지 말아 주길 바란다.


그런데 그 어린 왕갑 관료는 예산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아보였고 지지율과 인력과 정책 도입 시기에 시달리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청와대에서 수천수만 거리 떨어진 학교 한가운데에서 지 할일 남 할일을 구분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구석은 보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왜 그러지?"

그러자 그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나 되는 듯이 소곤 소곤 다시 지령을 내렸다.

"부탁이야 돌봄 교실 업무 하나 맡아줘..."

너무도 인상 쩔은 식겁한 일을 당하게 되면 누구나 거기에 순순히 따르게 마련이다. 보건 복지부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학교에서 야근의 노동을 마주하고 있는 중에 참 엉뚱한 짓이라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는 업무관리 시스템에 접속해 제목과 본문을 달았다.

그러자 내가 담당해야 하는 일은 상담, 수업, 생활지도라는 생각이 나서 그 어린 왕갑에게 나는 다른 업무를 할줄 모른다고 (조금 기분이 나빠져서) 말했다.
그는 대답했다.


"괜찮아. 돌봄 업무를 하나 맡아줘."

보육 업무는 한번도 맡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를 위해 내가 담당할 수 있는 단 두가지 업무 중에 하나를 다시 설명했다.

속이 보이지 않는 학생들의 마음 그림 말이다. 그러자 그 어린왕갑은

"아냐 아냐 학생들 마음 속은 다 착해. 애들은 다 착해. 선생이 위험해. 그리고 학교는 아주 하는 일 없고 노력도 안하고, 다가오는 4차 산업 혁명에 전혀 대응 못해.


헌데 내게는 업무 민원 맡아줄 양같은 곳이 필요해. 보육 업무를 맡아줘."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돌봄 교실 업무를 받았다. 그는 주의 깊게 보더니

"안돼! 이걸로는 부족해. 벌써 민원이 쇄도하는 걸" 하고 말하고는
"방과후 다채로운 활동도 맡아줘."

나는 또 업무를 받았다.


"봐.... 이건 다른 사교육에 비해 프로그램이 별로 다양하지 못하쟎아... 공교육이 책임져야지..."

그래서 나는 지역 인사들과 시간 강사분들을 섭외했다.

그러나 그것도 앞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푸념을 들었다.

"강사비 정산이랑 미납 문제 얼릉 처리해야지. 나는 오래 오래 다양하게 써먹을 학교를 갖고 싶어."

나는 생기부 마감을 서둘러야 했으므로 더이상 참지 못하고 보고서를 되는대로 끄적거려 놓고는 한마디 툭 던졌다.


"이건 주머니야. 네가 원하는 업무를 그 안에 넣어."

그러나 어린왕갑의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걸 보고 나는 새삼 사색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자세야! 학교는 더 많은 바깥 일을 받아야해. "

"왜 그런 업무를 주지?"

"교사, 학교가 하는 일은 너무 적었거든"


"이미 있는 업무로 충분히 벅차다구. 네가 주는 업무는 다른 부처의 일이야."

그는 고개를 숙여 주머니를 들여다 보았다.

"아직 더 집어 넣을 수 있는 걸 같은걸.. 어머. 이 업무도 받아가. 학폭, 청소년 단체, 안전, 또 뭐있더라 어 이거랑 저거랑"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왕갑이 떠넘긴 모든 업무를 다 맡게 되었다.


#패러디문학관


(원작 :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