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평가제 5/5
< 학부모 평가제 5/5 >
#학교SF소설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술은 못했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돕기도 한다. 흐린 판단력에 없던 결단이 생긴다. 그 결단이 옳은지 틀렸는지는 다행히 술이 깬 다음날에도 알 수 없다. 병훈은 두통을 느꼈다. 과음 탓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딸 아침 식사를 챙겨야 할 시간이었다. 어제 과음한 모습에 또 얼마나 실망했을까.

-아이돌 굿즈 폰

단우가 보낸 협박 통보 문자가 생각났다. 뭐라고 답장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폰을 열었다. 홍은동 아빠 모임이 끝날 때까지 주고 받은 문자가 없었다. 딸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 아빠? 다음주까지 학부모 평가 점수 정정 기간이라네?

딸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요즘 한참 격투기를 배우는데 취미를 붙였다. 방과후 수업에서 격투기를 배운지 3개월이 지났다. 어제밤 집에 돌아올 때 이미 잠든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 폰을 다시 꺼내들었다.

"단우 아빠. 동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함께 싸워 나갑시다." 열변을 토하던 현주 아빠, 기화가 보낸 문자는 새벽 한시 반. 어림잡아 새벽 두시에 집에 들어 온 것 같다.

왜 성과급 균등 분배에 동의한다고 했을까. 술자리에서 내린 결정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걸까.

어차피 지금 받을 성과급은 적을 것이 분명했다. 성과급 균등 분배에 동참하면 균등 분배 금액 자체가 쪼그라 들테다. 미안했다. 자기 덕에 금전적 손해를 볼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아닌가, 모두 나처럼 최하점에 가까운 사람들만 모이는 걸까? 그러면 내 분배금은 더 떨어지는 걸까? 정말 잘한 걸까?

더 생각 안하기로 했다. 이미 동의서에 사인했다.

병훈은 해장도 할겸 아침 식사로 콩나물 국을 먹기로 했다. 3분 요리들로 가득찬 찬장을 열었다. 단우 입맛에 맞을까.

"아빠.. 언제 일어났어? "

단우가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왔다. 병훈은 왜 내가 딸아이 눈치를 봐야 하는건지 한심했다. 그깟 승진이 뭐라고. 그깟 세금 혜택이 뭐라고 더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엄마 없는 빈자리 채워주려고 이미 딸 아이 눈치를 볼만큼 보고 살아왔다. 미안함에, 안타까움에. 이젠 아이 취향 눈치까지 봐줘야 하는 건가. 자신이 한심했다.

이대로 인사 고과에 학부모 평가 점수가 넘어가면, 영업 2과장 - 입사동기 황과장보다 승진이 늦어질게 분명했다. 황과장도 그걸 알고 말을 머뭇거렸을테다.

"콩나물 국 괜찮아?" 아빠가 속이 덜 풀려서 그렇다, 그냥 먹어주라. 말하고 싶었다.

"응. 암튼. 아빠 내가 꼭 그걸 바래서 그런 말한건 아닌데... CMTS 오빠들 폰 사주기로 한 거 너무 고마워. 히히."

술기운에 사주겠노라고 통화했었나 보다. 어찌 저런 천사같은 눈웃음을 치며 저리도 계산기를 두들길 수 있을까. 병훈은 애써 딸아이의 미소를 보지 않으려 가스렌지로 몸을 돌렸다.

딸아, 네가 싸지른 점수때문에 내가 네 담임까지, 교장까지 만나고 왔단다. 어떻게 하나뿐인 아빠에게 그렇게 매몰찬 점수를 줄 수 있느냐. 뭐가 부족했니? 지금 점수따위로 부녀 관계를 이렇게 들고 쥐고 하는 것이 맞니?

병훈은 계속 속으로 말을 삼켰다. 협상을 더 끌기 싫었다.
아빠인 것도 싫었다. 도대체 뭐하러 그 고생을 해서 돈을 벌고 집세를 내고 전기세를 내고 교복을 사고 문제집을 사고 용돈을 주고 쌀을 샀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내 옷을 못사고 내 취미 생활을 못하고 내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줄여왔던 것일까.

단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병훈은 콩나물 국을 내려다보며 수증기에 눈을 숨겼다.

- 띵

냉동밥도 해동이 끝났다. 마침 콩나물 국도 다 뎁혀졌다. 밥맛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래도 구겨 넣어야 했다. 딸은 폰으로 계속 메신저를 주고 받으며 밥을 먹었다. 밥상머리 교육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려면 , 아 됐어, 부터 튀어 나오는 딸내미. 요즘 아빠들 답지 않게 잔소리를 많이 해서였을까? 학부모 평가 점수도 낮았다. 더이상 대화도 쉽지 않았다.

왜 자꾸 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왜 자꾸 손해보는 기분이 드는 걸까.
아빠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CTMS 오빠들이 선전하는 김가루다." 병훈은 바지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김가루를 꺼내 딸아이 밥 옆에 두었다.

"어머! 아빠! 최고! 우와! 아빠! 나 밥 맛있게 먹을게!!"

속은 속대로 썩고 돈은 돈대로 썩어 나갔다. 썩은 미소를 억지로 지어짰다.

"그래 그래. 우리 딸이 이렇게 기뻐하니 아빠가 너무 기분이 좋은걸. 아하. 아하"

씁쓸한 표정을 행여 딸이 볼까 병훈은 얼굴 근육에 온갖 힘을 다 주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밥을 싹싹 비운 단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다. 좀처럼 하지 않은 행동이다. 병훈은 최선을 다했다.

"냅둬. 너 학교 가야지. 아빠가 할게."

단우는 설겆이 물을 틀고 그릇을 문질렀다.
"아참.. 그리고 아빠... 실은..나 어제 아빠 오면 말하려고 했었는데...."

말투가 낯설었다. 평가자의 톤이 아니었다.

"아빠... 실은... " 딸은 말없이 거실 쇼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더 격한 손동작으로 그릇을 문질렀다.

통보하던 이가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쇼파 위 편지 봉투를 집었다.
병훈의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

= 학부모 소환장. 김단우 학부모님께
( => 5 슬기로운 교장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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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일

EBS 미래를 여는 교육 MC /KBS 라디오 공부가 재미있다 출연진/너도 모르는 네맘 나는 알지 저자/아이스크림 원격 연수원 사회 교실 강사/MBC 스페셜 '선생님 마이크로 교실을 깨우다'/소통 강사/진로 특강 강사/스마트 워크 강사/안태일 학교시집/탤짱닷컴 tv/출제해서 생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