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플래너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오뚜기 간편 요리가 익을 시간보다 조금 짧았다. 책상 밖으로 빼꼼히 삐져나온 다리들. 무릎에 올려 둔 가방 끈을 부여잡은 손들. h고 1학년 9반 아이들의 첫 방학식 날.  일분이라도 더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픈 아이들의 몸짓을 지긋이 즈려 밟아주었다.  

"방학식 마지막 잔소리 시작한다. 이번 방학 프로젝트의 핵심은,플래너 쓰기야."

교장 선생님 훈화보다 더 길게 분명한 담임 선생님의 방학 잔소리를 막고 싶은 귀들이 팔랑 팔랑 문을 닫으려 하는 듯했다. 옅은 한숨 소리가 여기 저기서 새어 나온다.

담임 교사의 숨막히는 잔소리가 귀를 비집고 엄습하더니 좌심방과 우심실을 타고 다시 올라와 아이들의 미간에 주름을 찍어냈다. 귀염둥이 두세명은 옅은 탄식을 내뱉는다. 무릎위에 올려둔 가방을 체념하듯 책상 위에 내려 놓는다.
책상 밖에 내놓았던 다리를 다시 책상에 집어 넣는다. 당분간 이 다리는 운동장 흙을 밟을 수 없다는 걸 본능이 알아챘다. 아이들의 온몸 반응에 피식 미소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헛기침 소리에 숨기고 잔소리를 이었다.

"밴드 톡에 매일 매일 플래너 쓴 것과 공부한 흔적, 그리고 학습 일기, 독서 활동, 진로 탐색 활동 사진 찍어서 보내기로 한거 기억하지? 수시는 말야 사실 여러분 입장에서 참 고단한 긴 여정같은거야. 사하라 사막 마라톤 같은 거라 느끼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긴 여정을 통해 여러분이 단순히 성적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거야."

사하라 사막까지 갈 필요 있습니까, 이곳이 이미 황사 가득한 대륙 사막같은 걸요. 표정으로 하소연을 쏟아내는 아이들의 원망 깊게 베인 눈빛을 피해 잠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방학중 플래너 검사가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다시 강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을 위한 나의 헌신이라고 세뇌하듯 귀에 밀어 넣어 주었다.

플래너 프로젝트 보고를 하루 미루면 개학후 하루 청소 봉사를 제안했다.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지만 제안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아 제안이라고 우겼다.

개학 후 청소 봉사 제안은 어디까지나 안전 장치였을 뿐이였다. 모두가 열심히 방학 프로젝트에 참여할테니까. 혼자서 쓸쓸하게 교실 전체를 쓸고 닦는 것은 아이들에게 너무도 잔혹한 수행이다. 청소 봉사의 무게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3년 동안 끝없이 채워나가야할 수시 빈그릇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열심히 참여할 거라 믿었었다.
방학중에 다른 일로도 바쁘실 담임 선생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도 느낄 거라 상상했다.

방학 직후 바로 플래너 검사를 하지 않고 4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했다. 이 유예기간은 아이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담임 교사에게도 쉼있는 날을 주기 위해서였다. 방학 직후 제주도에서 3박 4일간 스쿠터 투어를 떠나야 했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밴드톡에 전체 공지를 띄웠다.

"여러분 이제 우리 새롭게 시작합시다. 4일동안 푹 쉬었나요? 자 내일부터 플래너 검사, 방학 중 비교과 활동 보고를 실시합니다. 많이 덥죠? 아참 잊지 마세요. 여러분. 잘한 친구들에게는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깜빡한 친구들에게는 개학 후 청소 봉사 자아 성찰 수행이 있다는 것을. ^^"

반장 부반장에게는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들에게 카톡을 보내서 열심히 참여하자고 독려하자. 학급 리더로서 먼저 솔선수범도 하고 말이야."

더운 날 목을 타고 내리던 땀물처럼 방학날이 빨리도 흘렀다. 더위에 허언증 걸린 하루 하루 끝에, 이제 1주일 뒤면 개학이다. 머리로는 예상했지만 마음으로는 상상도 못했던 처참한 결과다. 하루 평균 6명 정도의 아이들만 방학 미션 톡을 보냈다. 구글 스프레드 시트에 정리해둔 아이들 청소 봉사를 세어보았다. 2학년 진급해도 한학기 정도는 가볍게 커버할 수 있는 인력풀이다. 청소 외주 용역 업체 하나 차려도 될 규모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번에 달라지게 할 수 있었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종교일테고 나는 담임 교사가 아니라 신흥 종교 교주였겠거니 하며 헛웃음을 연신 내뱉는다.

수능 시대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시는 더더욱 매일 매일 꾸준한 학습과 준비가 중요하다. 10번의 지필고사와 그만큼의 수행평가, 스토리를 담은 봉사활동과 독서활동, 진로를 향한 동아리 활동과 각종 실적들.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담임 교사는 이 차가운 현실을 알기에 뜨거웠고, 아이들은 그저 뜨거운 더위에 지쳐 냉냉했나 보다.

학습 열기가 여기보다 조금은 더 뜨거울 '그' 학교들 풍경은 어떨까 잠시 상상해봤다. 학업과 비교과 활동에 온몸을 들이 던져 매진하는 모습에 안타까웠던 담임 교사는, 아이들 위로해주려 실없는 농담 메시지를 날려주었을까? 매일 매일 아이들이 담임 교사의 정성에 감사하며 사랑 담은 학습 일기 메시지를 주고 받았을까. 잠시 손가락을 들어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들 숫자를 '그' 학교에 맞춰보았다. 헛웃음이 또 새어나왔다. 너무 많으면 그거대로 또 푸념을 늘어 놓진 않았을까.

무더위에 소나기 찔끔 내리듯 보내주는 6,7명 아이들의 학습 일기 메시지. 고작 그 숫자에 허덕이지 않았나 되물어본다. 학급 전체가 모두 성실했다면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을까, 비명을 지르며 행복하다 했을까. 어쩌면 이 속깊은 우리반 아이들이 담임 교사에게 내려 놓을 줄 아는 방학을 선물해 주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희생해 준 거라 우기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뭐라도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고 싶었던 이 시작의 마음이, 실망이나 분노나 포기로 전이되지 않았다. 그게 또 스스로가 참 대견스럽다. 청소 봉사 장부를 다시 정리하며 봉사 날짜를 배정해 본다. 더운 여름 잘 즐기시고 개학후 보자꾸나.

두고 보자꾸나.


댓글,  0

;; ;;
더보기

안태일

EBS 미래를 여는 교육 MC /KBS 라디오 공부가 재미있다 출연진/너도 모르는 네맘 나는 알지 저자/아이스크림 원격 연수원 사회 교실 강사/MBC 스페셜 '선생님 마이크로 교실을 깨우다'/소통 강사/진로 특강 강사/스마트 워크 강사/안태일 학교시집/탤짱닷컴 tv/출제해서 생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