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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6월 민주화 항쟁!

# 역사에는 '전문가'분들이 있습니다. 이 글 들은, '전문가'의 글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야 할 때 알고 있어야 할,
'상식' 수준의 글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는, 다른 역사적 사건들이 엉키고 얽혀있습니다. 중간 중간 빠져 있는 고리들은 차근 차근 채워 나가고자 합니다.

# 사진 출처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즉시 수정하도록하겠습니다.



4줄 요약

1. 1987년 6월 전국에서 동시에 발생한 민주화 운동

2. 도화선 :  '박종철 님 고문-사망 사건', '이한열 열사 사망' 그리고 '호헌조치'

3. 주요 키워드 : 호헌 철폐, 독재타도, 대통령 직선제, 노태우, 전두환, 명동성당

4. 결과 : 대통령 직선제 쟁취, 헌법 개정, 노동 운동 활성화




1. 끝없는 민주화 운동. 당시 상황

2 박종철 열사 고문, 사망 사건

3. 1987년 4월 호헌 선언

4.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 사망

5. 명동 성당 투쟁과 김수환 추기경

6. 넥타이 부대와 꽃

7. 6. 29 선언

8. 헌법 개정

9. 그리고, 대선





1. 끝없는 민주화 운동. 당시 상황

  • 광주 민주화 항쟁을 피로 진압한 전두환 일당은 아직도 역사의 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상황 정의는 간단합니다. 전두환은, 불법적인 쿠데타를 일으켰고, 전두환의 계엄군은, '반란군'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즉, (계엄군 장병들 역시,  희생자였음을 기억합니다) 계엄군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한민국의 권력기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합법적인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5.18의 정신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될 만큼, 뜻깊은 민주화 항쟁이었습니다.


5.17 쿠데타와 5.18 광주. 결국,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결국, 정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간선제란,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국민들은, '실질적으로- 현실적으로-애시당초'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을수가 없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국민들의 눈을 돌리는, 그 유명한 3s 정책을 쓰는 것과 동시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누명을 씌우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따윈 관심 끊고 야구나 보라고!"


당시, 전두환의 독재 행각과 이에 맞서던 민주화 운동의 불길.

그리고, 너무도, 치사하고, 비열하고, 잔인한 '간첩 조작 사건'들... 


그리고 1985년 총선(총선이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를 말합니다)에서
야당이 돌풍을 일으킵니다




행정부의짱, 그러니까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대통령, 의원내각제에서는 총리
요 두분을 모시고 있는 정당은, 힘이 있겠죠?

그래서 부를때 "여..보세요" 해서 여당이고
그렇지 않은 정당은, "야! 임마!" 해서 야당으로.......
기억하시면 됩니다

2. 박종철 열사 고문, 사망 사건 (1987년 1월)


이 사건 역시, 많은 이야기를, 그리고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아픔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당시, 박종철 님은, 선배인 박종운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남영동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만 정작, 박종운은, 후에,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는 것이야 말로 종철이가 바라던 세상을 여는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고문으로, 죄없는 국민을 살해한 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크라잉넛은 '지독한 노래'에서당시 사건을  "탁 치니 억 죽고 물먹이니 얼싸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는 가사로 당시 상황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노래방에서 제가 이 노래 부르면, 일행들은...갑자기 화장실을 가는 듯...자리를 비우기도 한다는....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을,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거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고, 잡아 가두는, 이들의 행위는

일제 강점기, 일본놈들이 하는 행동과 다를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3. 1987년 4월 호헌 선언


2013년 현재 노태우는 231억 미납
사진 왼편에는 극빈곤층 전씨

당시 민정당(전두환, 노태우가 있던 정당.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현 새누리당의 전신)은,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싶었습니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후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










전두환
 : 무기징역(반란 및 내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 및 상관 살해 미수 등)

노태우 : 징역 17년(반란 및 내란 중요 임무 종사와 상관 살해 미수 등)


내각제에 대한 설명은 이 쪽으로



야당측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강력하게 원했습니다. 계산기를 두들겨 본, 전두환은, 내각제가 아니면 개헌따위는 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습니다.

그리고는 4월 13일에(이 날짜를 고른 타이밍도, 참 짱구 많이 굴렸습니다. 4.13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 발기인 대회가 있었거든요. 그걸 묻히려는 꼼수도 함께 였습니다. 당시 통일 민주당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궁극의 합체를 완성한-후에 갈라지지만- 정당이었습니다)


'궁극의 퓨전!!!....이었으나..'



호헌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헌이란, 보호하겠다, 현행 헌법을, 이란 뜻입니다)

전두환 왈

1) 나는 개헌 하려 했는데, 님들이 합의 안해서 안하겠뜸
2) 그냥 지금처럼 간선제 해서 2월달에 물러날 예정임
3) 일단 88 올림픽, 호돌이 히트치고 나서, 개헌이야기 하는 걸로


'그냥 모두 ㄷ 치고, 올림픽 포에버!'




4.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

전두환의 호헌 조치 발표로 전국에서 시위의 불길이 올랐습니다. 1987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  추도미사에서,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님의 고문- 살해 사건을 폭로하였습니다. 이후,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줄여서, 국본)이 결성됩니다. 


1987년 6월 9일.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이한열 님은, 직사로 쏜 (원래, 최루탄은 곡사로 쏩니다. 즉 총을 위로 비스듬히 쏴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떨어져 가스를 발포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걸 직사-총을 수평으로 놓고-로 쏜것입니다!!)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7월 5일.....22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한열 열사님의 장례식때 추도사를 맡으신 문익환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은, 문성근씨의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이한열 열사의 국민장에 모인 시민들



'국본'은 1987년 6월 10일에 ,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을 규탄하며,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전국 대 도시를 중심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열고자 했습니다.

(박종철 님은, 앞서, 고문으로 돌아가셨던.... 분이십니다)





영정을 든 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
좌측에 키큰 사람, 문재인 




6월 10일은 민정당(전두환-노태우 정당)이, 노태우를 대선 후보로 선포하려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미리 포착한 경찰은, 국본 리더들을 체포하였고,  시위대는 산발적으로 시위를 하다 , 이때 시위대가 명동 성당으로 대피하게 됩니다.




5. 명동 성당 투쟁과 김수환 추기경

이때 명동 성당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경찰의 진압을 막았습니다. 




 1987년은 올림픽을 1년 앞둔 시기였습니다. 만약, 한국 가톨릭의 중심인, 명동성당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을 무시할 경우, 이는 가톨릭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해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당시 국가 권력기관도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시위대를 지지하기 위해 자발적 성금을 모으기도 하며, 식료품 등의 물품을 모아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5. 18 광주 민주화 항쟁때 처럼, 계엄령을 선포하고 , 계엄군을 투입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5.18때와 다르게, 당시 미국 의회(상원)는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 시키며, 전두환을 압박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올림픽과 미국의 압박을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6. 넥타이 부대와 꽃






당시 시위는, 그전까지의 민주화 운동과, 다른 점이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경제적 위기가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4.19 혁명의 경우(1960년,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에 대항, 이승만을 몰아낸 시민 혁명, 이후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이런......) 50년대 말, 미국의 무상 원조 중단으로 사회 불만이 높아져있었고



1979년 10월 부마 항쟁, 서울의 봄 등 역시,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제 혼란이, 국민들의 사회 불만을 높였다는, 해석이 있기도 합니다.


1979년 10월 부산 마산 항쟁




오해하지 말 것은, 민주화 운동을 이끈 분들은, 이러한 경제적 여건이 아닌, 순수한 민주주의 열망으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다만, 일반 국민들(정치적 무관심에 빠져있던)의 경우,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열망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해석입니다.



당시는
3저 호황에, 3S 정책이 얹혀져 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해석은 어느정도 힘을 얹는것 같습니다.

3저 호황이란,
낮은 국제 이자율, 낮은 석유 값, 낮은  달러화의 가치, 그리고 덩달아 낮은 원화의 가치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기 활성화되었던 시기를 말합니다.

당시, 미국은 국가 재정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해결 하기위해 G-5를 부릅니다. 그리고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이른바, 서독-일본 견제 대 작전(그러고보니, 둘다 자기가 키운...)
그 과정에서, 미국 돈의 가치를 확 떨어뜨리게 되고, 덩달아 다른 나라 돈의 가치는 올라가게 됩니다.

여기서 간단한 환율 원리

= 그나라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그나라 수출품의 가격이 떨어진다

이걸 기억해 두시면 되는데요

당시, 우리나라 원화의 가치도 오르긴 올랐는데, 엔화에 비하면, 오른것도 아니었지요.

결과적으로, 일본돈의 가치보다 원화의 가치가 확 떨어졌기 때문에

원화의가치가 떨어졌으니, 대한민국 수출품의 가격이 떨어져서, 그것은 우리나라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 강화!

이래저래, 당시는, 경제 호황이었습니다.


이런, 경제적 해석에 비추어봐도, 6월 민주 항쟁에, 일반 시민들의 적극 참여는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해석되지만






그 민주화의 열기에 근저에 깔린, 기본적 마이드도, 변한것이다, 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아, 국민들좀 제대로 먹여 살려라'에서 (경제적 영역이 좀더 큰 반면)

'정치이들아, 국민들의 말을 들어라' (순수한, 정치적 요구가 커졌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하였고, 넥타이를 멘 사람들까지(화이트 컬러, 하얀 셔츠를 입는 사람들, 사무직이란 뜻.  그전까지 시위는, 주로 공장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가 많았던 것에 ,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참여하게 됩니다.

진압하는 경찰에게, 꽃을 달아주며

"다세요, 당신들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아닙니까" 하고 호소하던 장면은 유명한 장면입니다.





7. 6. 29 선언

이에, 전두환 세력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최전방에 내세운 개헌 수용 선언을 하게 됩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이때 개정된 헌법입니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당시 전두환 세력들은
"그래봤자........네들은 ㅋㅋㅋ 그냥 우리는, 노태우 이미지 메이킹 하는 선에서
양보하겠음.. ㅎㅎㅎ"
하며, 국민들을 기만했기에 가능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만은..................


이때 헌법(그러니까 지금 헌법이겠죠)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적 정통을 이어 받겠다고 명시 했습니다
2)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의회 해산권 -   이거 발동되면, 국회의원들 벳지 다 버리고,
집으로 컴 백 홈 해야하는 무시 무시한 권한.)이 드디어 사라지게 됩니다.





본래 의회 해산권은, 의원내각제에서 주로 사용되는 권한입니다. (이원집정부제는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구요)

이 의회 해산권에 대응해서, 의회가 갖고 있는 권한은, 내각 불신임권입니다. 의회가
"내각 불신임이다 이것들아!"하고 외치게 되면, 총리를 비롯한 모든 장관들이 (총리와 장관이 모여 있는 집단을 내각이라고 합니다. 즉, 행정부를 말하죠) 옷벗고 집에 가야 하는
역시나 화끈하고도 무시 무시한 권한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수 있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해임시킬수 없었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권한이었습니다.

3) 헌법재판소, 지방자치 부활

4) 그외.

5) 대통령 직선제, 7년에서 5년으로 임기 축소.


여기서, 일단 포인트는, 대통령 직선제가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완전한 의미에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매 정권때마다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암튼!

이제 , 대한민국은,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8. 그리고, 대선


앞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퓨전~~을 통해 창당했던 통일 민주당, 기억 나시죠.

국민 여론은, 여기서 한 사람만 나가면, 그냥 그대로 당선될,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후보 선출 과정에서 (여기에서 여러가지 말들이 있지만, 일단 패스)

김대중 라인은 탈당을 선언하고, 평화 민주당을 창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따로 따로 대통령 후보로 나가게 되고

노태우는, 오예, 를 외치고, 끝내주게 선거 운동합니다. (그당시,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노태우님께서 하사해주신 온갖 수건, 비누 같은 불법 선거 물품들이 있었..........)

그러다가.......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음모론 이라고도 합니다) 일단 공식적인 해석은, 북한이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테러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늘 그렇듯, 북한이 움직이면 유리한 것은...........) 노태우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개표 당시에, 부정선거 의혹이 있었습니다. 부재자 투표함이 봉인되지 않는등, 여러 의혹들이 있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태우 36.6 퍼센트 (이 득표율은 뭔가요................)

김영삼 통일민주당 28 퍼센트

김대중 평화민주당 27퍼센트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8.1 퍼센트
등이었습니다




이후, 희대의 사건인 3당 합당 사건이 자행되고 (김종필, 김영삼이 노태우의 품에 안기는.....) 여기서, 노무현 의원이 관심을 받게 됩니다.



6월 민주 항쟁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다양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때의 뜨거운 함성과 희생과 열정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만드는데 공헌했다는 것입니다.

피와 눈물, 그리고 삶을 희생해주신, '어른'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GTT 안태일 쌤의 상식 수준의 현대사  1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