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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회는 만선 바다에서

category 글적글적 2018. 12. 16. 19:58



세상에 고등어회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모른다. 사람마다 입맛이 당연히 달라야 한다지만 그게 고등어회일 때 문화상대주의 정신이 사라지고 자문화 중심주의로 무장한다. 어떻게 고등어회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람들은 분명 육지 시내에서 파는 얇고 비린내 나는 가짜 고등어회만 먹어 본 사람이 분명하다. 제주도 현지에서 고등어 장인이 만든 고등어회를 못 먹어본 사람이 틀림없다. 고등어회만큼은 나는 자문화 중심주의를 넘어 문화 제국주의적 스탠스를 취한다. 기본적으로 고등어회는 매우 맛있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만고 불변의 진리다. 고등어회가 맛없으려면 매우 고등어회답지 않은 비극이 벌어져야만 한다.

여름마다 제주도로 향한다. 스쿠터에 몸을 싣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며 바람을 느끼고 바다를 갖고 음식을 충전한다.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배부르며 적당히 행복을 누린다. 이런 행복을 더 확실하게 누리기 위해서라도 육지에서 또 학교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m고 근무 시절 스쿠터 투어 멤버를 한 명 꼬셨다.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Y 교사에게 먼저 접근해 치킨에 맥주 한잔하자고 권했다. M고에 근무한 지 딱 1년 2개월이 지난 봄이었다.

"여행 좋아해요?"

맥주잔을 앞에 두고 어색한 기운이 돌 때 즈음 슬쩍 Y 교사에게 물었다. 예의를 갖춰 초면의 분위기를 이어가던 Y 교사는 갑자기 눈빛이 변했다. Y 교사는 스카이패스인지 스카이 대학인지 하는 마일리지를 보여주며, 이제 한 번만 비행기를 타면 쌓은 마일리지로 미국까지 항공권이 생긴다고 했다. 그것도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이 생긴다고 했다.

해외여행은 패키지가 전부인 내게 Y 교사는 근대 계몽 운동가 정신을 가득 품고 무지몽매한 패키지 인생에게 자유 여행이 얼마나 좋은지를 설파했다.

"제주도 좋아해요?"

화제를 제주도로 돌렸다. 해외여행, 육지 여행은 밀리지만 제주도 여행이라면 수다의 주도권을 내가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었다. Y 교사는 신이 나서 올레길 올 클리어 스토리와 각종 오름을 정복한 뚜벅이 여행의 아름다움을 설파했다. 밀릴 수 없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는 취기가 급히도 퍼질 것만 같았다.

"제주도는 스쿠터로 돌아야 제맛이죠."

주춤. 분명 Y 교사의 눈빛이 주춤했다. 드디어 Y 교사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발견했다. 대화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한 투 머치 토커가 경청 모드로 이제야 돌아섰다.

여름 스쿠터 투어 복장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우선 수영복을 안에 입고 그 위에 언제든 쉽게 벗을 수 있는 긴 츄리닝 바지를 입으라, 상의는 긴 래시가드를 입어라, 그리고 스쿠터에 몸을 싣고 달리라, 가다가 바다가 보이면 츄리닝 바지만 벗고 그대로 바다로 풍덩 하라, 물놀이가 끝나면 그대로 스쿠터에 몸을 싣고 달려라, 그러면 자연스레 물기가 사라진다, 그러다 다시 바다가 보이면 다시 풍덩 하라, 몇 년간 갈고 닦은 제주도 스쿠터 투어 놀이를 신나게 떠들었다.

"밥은요?"

Y 교사가 밥을 물었다. 주춤. Y 교사는 열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힘주어 물었다.

"대충…. 뭐…. 고기 국수 먹고…. 뭐…. 아무거나…."

아무거나 먹는다는 말에 Y 교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주도는 먹으러 가는 거죠. 거기까지 가서 왜 컵라면을 먹어요?"



Y 교사는 제주도 맛집 리스트를 주르륵 불렀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제주도는 그저 스쿠터 타러 가는 곳이라 믿었던 내게 식도락의 신세계가 하늘을 열었다. 온갖 흑돼지와 제주 소주와 제주 막걸리와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에 대해서 Y 교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양소 제공업체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그의 입에서 고등어회 이야기가 나왔다.

"고등어를 회로 먹는다고? 고등어는 조리거나 구워 먹는 생선이잖아?"

처음 사석에서 만난 Y 교사와 나는 그 날로 제주도 스쿠터 투어 계획을 잡았다. 처음 통성명하는 날 바로 여행 일정을 짤 줄이야. 이 모든 것이 순전히 고등어회 때문이었다. 여름이 드디어 다가왔고 비행기는 하늘로 떴다가 내려왔고, 우리는 스쿠터에 몸을 싣고 곧장 고등어회를 잘한다는 서귀포 모슬포항 <만선 식당> 근처 숙소로 향했다. 짐을 풀자마자 바로 고등어회 장인이 매일 신선한 고등어를 잡는다는 횟집으로 향했다.

만선 식당은 고등어 회만 팔았다. 처음 맛보는 고등어회. 고등어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음식이었다. 김에다 독특한 양념 맛이 나는 양파 조각과 찰진 밥을 넣고 그 위에 주인공인 고등어회를 사뿐히 올려 준다. 회란 자고로 순전히 회만 먹어야 한다고 믿던 내게 회 쌈을 처음으로 알려준 곳이었다.

어르신들과 횟집에 가면 그 비싼 회에다 쌈장을 듬뿍 발라 마늘을 넣어 상추에 싸서 드시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나였다. 저 강렬한 양념 탓에 회 맛을 제대로 느낄 수야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회를 싸 먹었다. 상추도 아니고 깻잎도 아니고 김에다 말이다.

아 그런데 이거 천상의 맛이다. 육지에서 느끼지 못했던 맛이니 분명 천상의 맛이 분명하렷다. 강한 양념은 김과 밥이 스물 쩍 데려가 자기들끼리 서로 중화하면서 지 몫을 다하고 사라졌다. 그 맛이 사라질 때쯤 입안 구석에서 고등어회의 쫄깃한 식감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물딱 입안을 유유히 떠다니던 고등어의 조각은 김과 양념과 밥이 뚫어놓은 맛의 길에 나타나 하늘 맛길로 혀를 이끌었다.

새로운 세계를 알아버린 나는 매년 모슬포항에 숙소를 잡았다. 만선 식당을 매일 가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제주도 스쿠터 투어는 해마다 코스가 똑같았다. 만선 식당이 있는 남서 쪽에 숙소를 잡으니 동쪽으로는 도무지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렌터카로 이동해도 대리비에 시간 문제로 어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다.

스쿠터는 오죽하랴. 자동차 전용 도로를 이용할 수 없는 스쿠터로는 아예 이동조차 할 수 없었다. 공항에서부터 남쪽 중문까지 반 시계 방향이 주된 코스가 되어버렸으니 해마다 가는 곳이 같을 수밖에.

그래도 어쩌랴. 맛있는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육지 횟집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제주도 내 다른 횟집도 이 만선 식당의 고등어회 맛과 비교할 수 없었다. 지겨움이야 익숙함이 주는 정겨움으로 퉁치면 그만이었다. 만선 식당에 가서 고등어회를 먹기 위해 1년을 기다렸으니 당연히 숙소는 만선 식당 근처여야 했다.

"안태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주 00 연수원 000 연구사라고 합니다. 다음 달 주말에 연수 강의를 오실 수 있으신지요."

초겨울 찬 바람이 교실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어느 날, 한 통의 초빙 메일을 받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는 제주도로 와달라는 초청장이었다. 메일을 받자마자 바로 전화 드렸다. 불러만 주시면 뼈도 던지고 오겠습니다, 강의 평점 만점에 빛나는 성실한 강의 알바꾼이옵니다, 몇 차시든 어떤 주제든 불러만 주시면 맞춰 드립니다. 여름이 아니어도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행복했다.

행복은 잠시, 머리를 싸매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제주 시내에 있는 연수원과 만선 식당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다. 택시비로 왕복 8만 원이나 나오는 거리였다. 작은 접시가 5만 원 큰 접시가 7만 원인데 배보다 배꼽이 커도 너무 컸다.

숙소를 만선 식당 근처로 잡기가 어려웠다. 토요일 오전 9시부터 강의가 시작되는데 낯선 제주도 자동차 길을 뚫고 먼 길을 출퇴근하긴 힘들었다. 십수 년째 초보운전자에게 낯선 곳의 먼 길은 고등어회를 향한 뜨거운 욕정에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한숨을 내 쉬고 마음을 비웠다. 여름으로 고등어회를 잠시 미뤄두고 시커먼 돼지와 멀건 국수로 제주 일정을 채우자고 체념했다.

비행기는 날아올랐고 땅에 내려왔다. 강의는 뜨거웠고 배는 고팠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 메뉴를 검색하는 내내 만선 식당의 고등어회가 아른아른 거렸다. 사랑하는 님을 몇미터 앞에두고 망설이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진정 사랑한다면 택시비가 대수랴. 비행기 삯도 연수원에서 내주었는데 택시비 하나 네가 해결 못 하느냐고 고등어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다른 자아가 비겁한 다른 자아를 비난하고 또 비난했다.

"만선 바다는 만선 식당만큼 맛있더라고요."

지도 어플로 만선을 무의식적으로 검색하다가 만선 바다라는 식당을 찾았다. 김밥 천국과 김밥 나라와 김밥 마을과 김밥 나라와 김밥 친구 같은 걸까.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만선 바다에 대해서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블로거들에게 물어본들 뭐가 달라질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제주 시내에 있는 만선 바다에 전화를 걸었다.

"아…. 그게요. 예전에는 만선 식당이었는데요 10여 년 전에 물려받고 이제 정리된 거예요."

그렇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서귀포 만선 식당과 제주시 만선 바다는 사촌지간 비스름한 관계란다. 침울한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희망찬 점퍼를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택시비도 5천 원 정도 거리였다. 행여 만선 식당보다 맛이 못하다 하더라도 왕복 택시비 차액 7만 원보다 크겠느냐는 생각으로 눈먼 사랑 자아와 비굴한 자아를 화해시켰다. 이제 나의 모든 자아는 하나가 되었다.

만선 바다에 몸을 던지기로 했다. 고등어회만 먹으면 되는 거였다. 만선 식당과 한 뿌리였다는 사장님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요 만선 식당이 없으면 만선 바다였다. 택시 기사님께 재촉하듯 길을 묻고 바다로 향했다.


만선 식당과 비슷한 상차림에 비슷한 빛깔의 고등어회가 나왔다. 두근거림과 의심거림이 맞물려 손가락은 서둘러 젓가락을 찾았다. 고등어회 자체의 맛을 느끼기 위해 양파 양념만 살짝 묻히고 고등어회를 슬쩍 집어 입안에 넣었다. 아….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입속에서 고등어회가 슬쩍 들어오더니 입속 블랙홀 어딘가로 슬며시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만 지나가는 사장님을 붙잡고 울듯이 말해버렸다.

"사장님! 이거 너무 맛있어요!!!"

사장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등어회 먹는 법을 알려주려 하셨다. 거만하고도 풍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먹을 줄 압니다.

서귀포 만선 식당과 다르게 제주도 만선 바다의 밥은 참기름이 좀 더 깊게 베었다. 참기름 베인 밥알과 양파 조림과 김이 서로 맞물려 천상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기가 막힌 것은 고등어였다. 만선 식당의 고등어는 간간이 가시가 숨어 있었다. 먹기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시를 한 번씩 뱉어내야 해서 귀찮기도 했었다. 만선 바다에는 가시가 조금도 없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가는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만선 식당에서 느낀 고등어회 맛이 하늘나라 맛이었다면 이건 은하계 너머 범 우주적인 맛이랄까. 지나가는 또 다른 사장님을 붙잡고 다시 울듯이 말했다.

"사장님. 이거…. 이거…. 만선 식당보다…. 훨...씬....아...훨씬...더 맛있어요..."





한 인상 하시던 남자 사장님은 인상을 스르륵 푸시며 의기양양 말씀하셨다.

"저희가……. 음…. 거기랑 이제 정리하고 나서 개량을 많이 했습니다. 훨씬 맛있죠?"

훨씬 맛있냐고 물으셨다. 람보르기니가 좋으냐 페라리가 좋으냐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만선 바다가 훨씬 좋았다. 대답했는지 안 했는지 손은 다시 김에다 양파와 밥과 영롱한 고등어회를 또 한 점 말아 넣고 있었다. 정신이 든 것은 우주적 축복이 이제 한 점만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만선 바다에 풍덩 빠진 지 이제 몇십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고등어회는 그만 메말라버렸다. 고등어를 추가하려는 자아를 눌렀다. 이 생각 없는 놈아 언제 다시 제주도 온단 말이냐 어서 시켜라 시켜라, 놈은 화내듯 결정권을 가져가려 했다.




어린 왕자 자아가 성급한 식탐 자아를 눌렀다. 만약 다음 달에 제주도에 가게 된다면 나는 내일 오후부터 한 달 동안 행복하겠지. 이 행복을 오래오래 누리려면 갈증이 채 가시지 않은 이 시점에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눈을 제주도로 향하게 하고 혀를 그리움에 사무치게 할 것이며 하루의 마감이 제주도로 한 걸음으로 느끼게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한 달을 더 행복하게 살게 하지 않겠느냐며 욕정 자아를 어르고 달래며 계산대로 향했다.

"사장님…. 제주도를 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터프한 인상의 남자 사장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기저기 소개 좀 많이 해주세요." 하셨다.

"Y야! 흑흑흑"

전화기를 꺼내 들고 Y 교사에게 신항로 개척 소식을 전했다. 내 흥분을 고스란히 건네받은 Y 교사도 수화기 너머 들뜨기 시작했다. 만선 바다 입구 바로 앞에 숙소가 가득하다는 걸 발견하고는 이제 새로운 베이스캠프를 찾았음을 통보했다. 좋은 말씀을 전해 들은 Y 교사는 서둘러 제주도 일정을 잡자고 했고 그리 하였다.

"절대로 만선 바다에 대해서 블로그나 페이스북 같은 데 올리지마. 우리만 먹어야 해."

Y 교사가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냐고? 이 집은 더 잘돼야 한다. 만선 바다가 만선 식당보다 맛나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마구 퍼져 나가면 사랑스러운 만선 식당도 크게 자극받지 않을까 하는 귀여운 속셈이다.

만선 바다랑 만선 식당이 서로 더 맛 경쟁을 치열하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제주도 동서남북 구석구석을 누비고도 빛깔 나게 맛난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세상에 고등어회를 안 좋아하는 분들이여, 고등어회를 먹어봤던 사람들이여, 나처럼 고등어회 때문에 서귀포에만 머물던 이들이여. 제주시에 만선 바다가 있다. 만선 식당과 만선 바다 고등어회는 매우 맛있다.

내년 여름도 또 겨울에도 가을에도 봄에도 고등어회다운 하루하루로 만선 가득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