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남은 국물을 혀로 핥듯이 비웠다. 한 방울도 남기기 싫었다. 김 줄기가 이빨 사이 사이에 둘러앉고 그 김 줄기의 미세한 송풍구 사이 사이에 마지막 남은 고기 국수의 맑은 국물이 이별을 노래하며 식도를 지나 몸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핸드폰 캘린더를 살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 시간을 확인하고 동선을 그렸다. 오전 열한 시에 서귀포에서 체크아웃하고 바로 내달리면 아슬아슬하게 이 고기국수를 한 그릇 더 먹고 비행기에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숫값을 계산하며 사장님께 5년 만에 말씀드렸다. 이 고기 국수가 얼마나 특별하고 사랑스럽고 행복 덩어리인지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사장님 국수 면발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전 이 집 국수 먹으려고 제주도 옵니다."
이 말은 거짓말은 아니지만 참말은 아니다. 나는 이 집 고기 국수와 만선 바다 + 만선 식당 고등어회를 먹기 위해 제주도에 온다.
어쨌든 나는 이 집 고기국수를 먹기 위해 제주도에 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사장님께서 깊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사장님께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셨고 그 마음 덕에 난 이 집의 이름과 위치를 비밀로 삼으려 했던 내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 고깃국수집의 이름은 용담생국수다.
여름 휴가는 여름 더위가 시작되고 한참 지나 없던 식욕마저 더 말라버린 뒤에야 찾아온다. 봄이 사라지고 가을이 소멸해버린 한반도의 기후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다. 봄?-여어어어어어어어어르으으으으으음-갈!-겨우우우우우울이 21세기 한국의 2강 2약 4계절이 되버린지 오래다.
봄날이 주는 시작의 온기는 반팔티를 서둘러 찾아야 하는 열기에 쫓기 듯 달아나고, 가을 날이 주는 결실의 선선함은 페딩을 서둘러 옷장에서 꺼내야 하는 한기에 밀리듯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여름이 길어져서 좋은 이유는 하나다. 없던 식욕이 오히려 생겨나 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의욕까지 일으켜 더운 여름을 버티게 살아가게 해준다.
일 년 내내 식욕 없이 지내는 나는 여름에만 식욕이 샘솟는다. 귀한 식욕을 채우려 위장과 침샘에 새겨둔 두 가지 메뉴를 찾아 제주로 떠난다. 고등어회와 고기 국수를 먹을 수 있는 제주도로 갈 날만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등어회를 잘하는 집을 찾기는 쉽다. 질 좋은 고등어를 공급받아 고등어회답게 잘 썰어내는 집은 드물지만, 그 드문 고등어 횟집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추천받아 간 고등어 횟집 대부분은 기분 좋게 고등어회에 취할 수 있었다.
문제는 고기 국수집이다. 제주도 고기국수를 다룬 블로그 포스팅들을 보면 흡사 우리나라 언론사들 같다. 우라까이라고 해서, 한 신문사가 기사를 올리면 검증도 없이 조사 몇 개 바꿔서 기사를 복붙하는 '일부' 기자님들의 만행이 있다.
제주도 고기 국수 맛집을 소개하는 블로그 포스팅을 훑다 보면 딱 우라까이다. 머리카락 하나 없는 메신저 캐릭터가 글 중간중간 튀어 나와서 놀란 표정, 침을 흘리는 듯한 표정,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블로그 포스팅 읽고 그 고기국수집을 가보면 하나같이 긴 줄이 이어져 최신 아이폰 출시일 애플 스토어 풍경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하나같이 맛이 없다.
면발은 스파게티 면처럼 두툼한 데다 어찌나 튼튼한지, 지금 내가 국수를 먹고 있는 것인지 고무줄 더미를 씹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줄 서서 들어온 육지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이 각도 저 각도 돌려가며 사진 찍느라 젓가락은 도대체 언제 들 건지 시간을 재보고 싶었다.
아마도 줄서서 들어온 육지인들은 우라까이 블로그 포스팅에서 본대로 다시 우라까이 하여 페이스북에, 인스타그램에, 블로그에 포스팅하겠지. 긴 줄 끝에 먹는 음식은 무조건 맛있을 거라며 모두가 집단 최면에 걸린 것인가.
아니면 음식이 맛있을 경우 주는 편익과 긴 줄이 주는 기회비용의 크기 중에 반드시 편익이 크길 바라는 합리적인 마음에, 혀를 양보한 것인가. 줄서서 들어온 육지인들의 사회적 현상에 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반쯤 먹던 국수를 버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겨울 칼바람을 남루한 스쿠터로 뚫고 처음 만난 00 국숫집이 긴 줄이 이어지고 나서 맛이 없어졌다. 00 국수집 맛이 변해버린 이후로 ㅁㅁ국수집도, 국수ㅇㅇ도, 00 국수도 그렇게 모두 하나둘 씩 사라졌다. 맛이 사라졌다. 추억도 사라졌다. 식욕도 사라졌다. 제주도에 와야 할 이유 절반이 사라져버렸다.
서울로 돌아와 시내에 있는 제주 고기 국수집들을 돌아다니며 내린 결론은 조금 서글펐다. 혀가 기억하는 현시대의 제주 고기국수 맛과 서울 시내에 있는 고기국수집 맛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제주 고기 국수는 태생적으로 맛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내가 찾는 맛의 끝은 돈코츠 라멘은 아니었을까. 한동안 제주 고기국수를 내려 놓고 일본 라멘집을 돌아다니며 혀가 내린 결론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현재 거주하는 동네가 슬슬 먹자골목 상권이 형성되자 역시나 우라까이 블로그 포스팅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맛없는 집이 맛집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제주 고기국수도 이랬을까.
그러다 지방에서 올라온 지인이 동네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갈만한 집이 있냐고 물었다.
주르륵 리스트를 불러주었다. 서울 시내에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육즙의 돼지고깃집, 가성비 최고인 육회 집, 명동 교자의 맛을 제대로 재현한 칼국숫집, 원두가 기가 막힌 카페, 체인점 중 최고라 자부하는 치킨집까지 술술 알려주었다. 그리고 가지 말아야 할 집들 리스트도 주르륵 불렀다.
리스트를 불러주다 보니 요 작은 먹자골목에도 이렇게 가게가 참 많았다는 새삼 신기했다.
"역시, 식당은 동네 사람한테 물어보는 것이 최고지."
지인은 고맙다며 일정을 쪼개서 한번 보자고 했다. 아, 그런데 고마운 건 내 쪽이었다. 만고불변의 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식당은 동네 사람한테 물어보는 것이 최고였다.
다시 여름휴가 기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날은 점점 더워졌고 내 없던 식탐이 뜨겁게 샘솟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떠올랐고 섬나라에 내렸다. 스쿠터 대여점 사장님이 공항에 픽업하러 차를 주차하자마자 물었다.
"사장님. 요즘 동네 분들 어디로 국수 먹으러 가시나요?"
사장님은 00국수와 국수00와 00국수 맛이 변했다며 말문을 여셨다. 와, 나만 느낀 것이 아니구나. 제주 동네 분과 입맛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줄서서 먹던 육지인은 신분이 상승한 듯한 기분에 취했다.
"요즘엔 동네 사람들 용담 생국수 가서 먹어요."
스쿠터 대여를 하기도 전에 폰 네비에 용담 생국수 주소부터 입력했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로 95 (용담2동 359-15)>
스쿠터는 달렸고 정지했으며 도로에 세워졌다. 이것저것 파는 듯한 작은 음식집에 들어섰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고기국수를 주문했다. 국수 말고도 이것저것 파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여러 메뉴를 파는 가게의 음식들이 맛있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스쿠터 사장님을 믿기로 했다. 동네에 오래 사셨던 제주 동네 분을 믿기로 했다. 줄서서 먹었던 육지인은 겸손하게 사장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