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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용봉탕 조리법을 검색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용봉탕 조리법을 검색했다.

 

조회를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설 때, 반 아이가 내 눈치를 보며 내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 오늘 가져오려 했는데 못 가져왔어요..."

 

"뭘 안 가져왔니?"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섯 글자를 내게 들려주었고, 나는 핵폭탄 여섯 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출생신고서요."

 

출. 생. 신. 고. 서. 요.

 

핵폭탄 여섯 개가 불러온 낙진이 전두엽을 지나 좌심방 우심실을 거쳐 좌뇌와 우뇌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다행히 담임 교사의 얼굴 근육은 1밀리의 미동도 없었다. 표정을 감춘 것이 아니라 표정을 짓지 못했다.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되니 표정도 멈췄다.

 

"아..."

 

"출생신고서 바로 가져오려했는데 깜빡했어요."

 

"아하..."

 

잠시 말의 간격을 얻고 재빨리 머리에 일할 것을 명했다. 머리는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이 아이는 아직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야. 그렇다면 초, 중, 고 내내 네이스에 등록될 리 없지 않은가. 이 아이가 부모가 된 것인가?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이럴 게 아니라 출석 인정 결석 관련 규정을 살펴봐야 할 것 아닌가.

 

이 아이의 늦둥이 동생이 태어난 것인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왜 내게 출생신고서를 제출한단 말인가. 혹시 내가 아빠가 된 거였을까? 아니야. 우리 아이 출생신고서를 왜 네가 가져온단 말인가.

 

머리는 피폭 낙진 후유증 덕에 더는 시나리오를 작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뇌는 생각을 멈출 것을 내게 통보했다. 멈춘 머리를 위해 입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 어... 출생신고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나는 이해하고 말리라 다짐했다. 머리가 이해가 안 되면 가슴이라도 이해하리라.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의 답을 기다렸다.

 

"아! 아! 아!"

 

아이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이가 웃으니 일단 나도 웃는 척했다. 억지웃음을 만드는 수고는 눈을 ㅅ자로 만들기보다 입 근육과 광대를 힘껏 끌어올리는 편이 쉬웠다.

 

하지만 내 억지웃음은 마스크에 가려 아이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애써 태연함을 지어내며 다시 물었다.

 

"뭘…. 안 가져왔다고 그랬지?"

 

"아. 출'결' 신고서요. 출결 신고서. 저번 주에 조퇴한 거. 출결 신고서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요."

 

억지웃음을 짓느라 힘껏 끌어올렸던 마스크 속 하관이 철퍼덕 떨어졌다. 그리고 안도의 옅은 한숨이 슬쩍 새어 나왔다.

 

"아... 출'결' 신고서를 안 가져왔구나. 출생이 아니라..출결. 내일 가져와."

 

아이를 교실로 들여보냈다. 교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용봉탕 조리법을 검색했었구나.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전해준 온갖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넣고 다니다 보니, 그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머리는 온갖 곳을 다녀왔다.

 

동사무소, 교장실, 상담실, 법원, 청소년 쉼터, 보건복지부, 경찰서, 병원, 교육청. 설레발도 이런 설레발이 없었다.

 

오늘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흘러갔다는 사실에 두 손 모아 감사 기도를 올렸다.

'자라'는 더는 만나지 않게 해주옵소서.

 

내일도 무사히.

 

올해 이렇게 끝까지 무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