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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최강 밥도둑, 그리고 광천

 

 밥도둑에는 가성비 절대 강자가 있다. 간장게장, 젓갈은 밥을 훔치는 능력치는 절대적이지만 가성비 측면에서는 김을 이길 수 없다. 김은 가격과 절도 능력에서 가장 균형 잡힌 밥도둑이다. 한식 메뉴에 기본 반찬으로, 편의점과 분식집의 주력 메뉴인 김밥의 주재료로, 그리고 나아가 케이 푸드 열풍을 타고 먼 바다 건너 효자 수출품으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특히나 광천김은 단순한 상표를 넘어서, 짭조름하고 바삭한 맛김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았었다. 명절이면 가성비 도둑은 가성비 선물 세트로 우리의 지갑을 지켜주었다. 광천은 신뢰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광천이라는 지명과 브랜드만으로 그 선물의 품질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 광천은 품질 좋은 김 그 자체를 의미했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광천이 사실은 광천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2023년 10월, 이 단단한 신뢰에 거대한 균열이 생긴 사태가 터졌다. 해양수산부가 광천김에 부여했던 지리적 표지제 등록을 취소했다. 지리적 표시제는 단순한 인증제가 아니다. 보성 녹차나 상주 곶감처럼 특정한 지역의 기후와 토양의 질 그리고 기술이 그 상품의 특별한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때만 부여되는 일종의 국가 공인 인증 마크다. 

 

이 표식은 소비자에게 “국가가 이 제품의 품질과 생산지의 특별함을 보증합니다.”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지리적 표시제 인증을 받은 수산물 제품 중에서, 인증이 박탈된 사안은 제도가 도입된 2009년 이래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신들 똑바로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경고 정도로 끝날 거야~ 앞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그때는 진짜 혼난다~~ 수준이 아니다. 국가가 보증했던 인증 마크를 박탈하고 거두어가는 가장 강력한 처벌이었다. 한국 고급 김의 대명사와 같았던 광천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사건의 발생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 한때 서해안 최대의 수산물 시장이었던 광천의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광천은 예로부터 김 양식의 최적 장소였다.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과 적절한 조수간만의 차 덕분에, 이곳에서 자란 원초(김의 원재료)는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이 영광은 산업화로 인해 오래 가지 못했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인근 연안 개발로 인한 환경 오염이 갯벌을 망가뜨렸다. 게다가 급격한 기후 변화가 광천을 뒤덮었다. 이로 인해 광천 앞바다의 김 양식장은 급격히 황폐해졌다. 광천에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원초 생산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광천김의 명성을 지켜줄 광천산 원초가 사라지고 만 셈이었다.


광천은 이대로 주저앉아 무너질 수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 아닌가. 광천의 김 생산자들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회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 카드가 바로 지리적 표시제였다. 김 생산자들은 핵심적인 논리에 재해석을 시도했다. 비록 광천에서는 더 이상 제대로 원초 생산을 할 수 없지만, 수십 년간 이어온 광천 지역 특유의 김 가공 기술을 계승했다는 명분과 논리를 내세웠다.

 
김 원초를 두 번 구워 김의 바삭함을 구현하는 기술, 질 좋은 소금과 기름으로 조미김을 생산해내는 노하우는 오로지 광천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기술이야말로 광천김의 품질을 결정하는 지역 고유의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2009년, 이 전략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광천김은 지리적 표시제 제16호(수산물) 등록에 성공했다. 소비자에게 “이 김은 광천 지역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광천만의 고유한 기술로 가공된 프리미엄 김입니다.”라고 국가가 보증을 서주었다. 강력한 보증인 덕에 광천김은 프리미엄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광천의 김 생산자는 다시금 광천의 명성을 되찾고, 돈도 벌 수 있었다.
 

여기까지 광천김의 스토리는 역경을 이겨낸 성공 스토리로 남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치명적인 유혹을 불러오고 말았다. 광천김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주문은 더 쏟아져 들어왔다. 돈을 더 벌고 싶어도 쉽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국내산 원초 가격이 하늘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유혹의 힘은 강했다. 바다 건너 중국산 원초의 가격은 국내산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유통되고 있었다. 광천 김의 일부 생산자들은 유혹의 CPU를 거부하지 못하고 열심히 연산 작업을 수행했다. 돈을 쉽게,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일부 김 생산자들은 일탈을 벌이고 말았다.
 
 
결국 사태는 터지고 말았다. 지리적 표시제를 관리하는 국립수산물 품질 관리원의 조사 결과는 광천김을 믿고 소비했던 많은 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광천김의 지리적 표시제 등록 단체인 광천김영어 조합법인의 일부 회원사들이 중국 등 외국산 김 원초를 대량으로 국내에 들여와 김 제품을 만들었다. 이들이 광천김 지리적 표시 마크를 버젓이 붙여 판매한 행위가 적발된 내역이다.

 

 

이러한 행위는 지리적 표시제의 뿌리를 뒤흔드는 범죄와 다름없었다. 배신이며 기만이며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해악 행위였다. 더 큰 문제는 관련 기관이 수차례 시정 명령을 내렸음에도 이러한 행위를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2023년 10월, 당국은 광천김에 대한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취소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14년간 지켜온 광천의 브랜드 가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광천김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쿠팡이나 지마켓 등 온라인 쇼핑몰에 광천김을 검색하면 무수히 많은 제품들이 검색된다. 광천김은 보통명사가 되었다. 초코파이, 딱풀처럼 이제는 누구나 광천김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제품에도 지리적 표시제 마크는 붙어있지 않다. 즉 국가가 그 품질과 지리적 고유성을 보증하는 광천김은 단 한 제품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먹는 광천김은 그 광천김이 아니다. 광천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도 광천김이라고 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소비자는 어떤 광천김이 진짜 광천김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에 대한 책임도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이 사태로 몇 가지 질문을 얻게 되었다. 지역 특산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원재료의 글로벌 공급 다양화 시대에 지역 특산물의 가치는 어떤 제품의 모든 원료가 그 지역의 산물로만 이뤄졌을 때에 인정되는 가치일까? 아니면 그 지역 특유의 가공 기술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가치일까? 아니면 그 지역 사람들로만 생산되어야 가치가 인정되는 방식일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는 요즘, 자연스레 한국의 식문화와 특산품에 대한 수요도 높아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쉽게 돈을 버는 유혹을 이겨내고 본래의 브랜드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그 관리 역시 더 엄격해져야 한다. 

 
 

브랜드의 신뢰도와 가치를 높이는 일은 지극히 오래 걸리고 힘들며, 우연이 겹쳐야 이뤄진다. 하지만 브랜드의 신뢰도와 가치가 땅에 떨어지는 일은 한순간에, 필연으로 터지고 만다.

 

나는 진짜 광천김을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