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2년 전 국정 한국사 교과서 농단 때 써본 교'괴'서.
#쓰다가혼미
------------

<만들고 싶은 현대사 교과서는 이런거니?-2>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은 혼란스러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긴급 조치를 선포하였다. 긴급 조치란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한 대통령의 긴급명령권과 유사한 제도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명령(대통령령)은 국회가 제정한 법률보다 하위에 위치한다.

이는 지역 패권주의에 빠져 정작 국정과 민생을 돌보지 않던 국회의원들의 부당한 법률제정권 밑에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방침이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모순을 갖고 있었다.

반면 긴급조치 또는 긴급명령권은 법률과 동급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정적이며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하여 긴급 조치를 수차례 선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불순 근로자들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다소간 불편을 겪었으나 국가 전체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서는 의미 있는 희생이었다.

근대화 국민 의식 함양과 낡은 악습 제거 및 건축물 현대화를 선포한 새마을 운동은 더욱 박차를 가했고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제2, 제3의 새마을 운동의 기반을 튼튼히 닦게 되었다.

1975년 광복군 출신으로 분류될 수 있었던 장준하가 사망하였다. 장준하의 독립 운동은 그 역할의 크기와 별도로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대한민국 건국절 이후 장준하가 보인 종북 발언과 반 국가적 발언은 국민 대통합 시대를 여는데 적지 않은 장애가 되었다. 장준하의 사망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한층 더 통합과 발전을 논하며 민생을 논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종북 좌파들의 반 국가 선동 폭동 행위가 자행되었다. 이를 부마 사태 또는 부마 폭동이라고 한다.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은 구국의 이념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가적 제압을 제안한다. 국민 대통합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던 당시 캄보디아의 정치적 노력을 예시로 들며 보다 강건한 치안 유지가 한국식 민주주의 발전 토대가 됨을 충정있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이권을 앞다투어 계산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현 국정원) 차지철 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여기에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가 김재규의 반란에 가세하여 대한민국은 무정부 사태에 도입하게 되었다.

이에 전두환 장군,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한민국의 국체를 흔들며 국가원수를 살해한 김재규와 정승화 도당을 척살하며 국가를 안정화 시키는데 앞장서게 된다.

혼란을 틈타 북괴의 침투를 예방하기 위해 구국의 결단으로 전국의 치안령에 준하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국가 안정화에 솔선수범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종북 좌파 대학생들이 국가 전복을 시도하여 대한민국은 4.19 사태 이후 또한번의 커다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호남 지역 국민들은 일련의 지역적 자괴감으로 누적된 분노를 악용한 종북 좌파 선동 세력들에게 설득 당하여 1980년 광주에서 5. 18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북한에서 침투한 북괴 간첩들이 살벌한 총기를 사용하며 국군을 살해하기도 하는 끔찍한 간첩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전두환 장군은 대한민국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직에 오르기로 결의한다. 이후 국민들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다방면의 노력을 실현한다.

첫째, 국민들의 여가 생활을 위하여 다양한 스포츠를 육성하였다. 그중 처음이 바로 대한민국 최대의 스포츠인 프로야구다.

둘째, 보다 격조 높은 문화 생활을 위하여 다양한 영화를 제작 방영하도록 영화 산업을 육성하였다. 또한 가정에서도 천연 색감을 누릴 수 있도록 칼라 티비 보급에 앞장섰다.

셋째, 뿌잉 뿌잉

1987년종북 좌파 대학생이었던 박종철이 합법적 수사 과정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평소 심장이 유약했던 박종철 군은 경찰의 단순 고함에 놀라 그대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를 다시 종북 좌파 배후 세력들이 선량한 국민들을 선동하여 6월 폭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8년 호돌이 올림픽을 개최하여야 했기에 종푹 좌파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리하여 개헌을 선포하였고, 몇가지 부작용은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첫째,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면서 유권자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를 진행하게 되어 많은 선거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둘째, 헌법재판소가 새로 생기게 되어 공무원 숫자가 늘어 작은 정부 실천에 큰 장애가 되며 이후 몇번의 국가 정책에 장애가 되어버렸다.

셋째, 지방자치가 부활되어 국론 통일이 힘들게 되었다. 경기도 성남시의 무분별한 좌파 공짜 복지 만능 포플리즘이 생기게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넷째, 대통령의 임기가 단축되어 안정적인 민생 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섯째, 국민의 기본권 향상이라는 허울 아래에 수많은 불순 세력들의 탄생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노태우 대통령 당선 이후 선거에서 여소야대, 즉 반국가 세력, 종북 좌파의 의석수가 더 많아지게 된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1990년 애국 세력 노태우와 구국 세력 김종필(박정희의 조카 사위) 그리고 한 때 반국가 세력이었으나 애국 세력으로 돌아온 김영삼의 3당 합당이 이뤄지며 안정적인 국가 정치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때 구국의 결단에 따른 3당 합당에 반란을 제기하던 불순 분자가 나타났다. 노무현은 구국의 결단에 따른 3당 합당에 토론을 해야 한다며 국민 대통합을 저해하며 분열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노무현의 종북 좌파 발언과 언행은 그가 행정부 수반을 역임하던 잃어버린 10년 후반기에도 이어지게 되었다.

/..............또 혼미해져서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