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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국정 한국사 교과서 농단 때 써본 교'괴'서.
#쓰고나니끔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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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싶은 현대사 교과서는 이런거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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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소수 의견에 따르면 상해 임시 정부 설립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에서 시작한다고 보아야 한다. 현행 헌법은 헌법 전문에 임시 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는다고 기술되어 있다.

반국가적 폭도들의 협박에 의해 급히 개정된 현행 헌법의 법리적 허술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절에 대한 명시와 임시 정부와 현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파를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잡고자하는 발상은 반 인륜적이며 대통합의 정신과 상반되어 많은 민중의 반대에 부딪혔다.

일제 합병기 시절은 국민 대다수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모두가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다. 자의적으로 친일의 정도를 판단하여 무리하게 강제 재산 환납, 구속, 누명을 일삼던 반민특위는 결국 민중의 요구와 시대의 변화로 자연스레 해체 되었다.

같은 해 폭력적 독립 운동 정책만을 강요하며 정작 자신은 독립 운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적 없던 김구가 제거되었다.

김구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달리 평화적 거시적 대안 없이 오로지 국수주의에만 테러에 준하는 활동을 일삼아 왔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이러한 독선적이며 폭력적인 방침을 고수하던 그는 국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한 국민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이 당시는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로 이러한 죽음은 종종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나라가 근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의 일부였다.

1950년 북괴군에 의해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강력한 염원을 담아 혈맹 미군에게 강하게 북진을 주장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며 민족의 대통합을 바라는 국부의 결단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과감하게 한강 다리를 전략적으로 폭파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이후 전쟁의 혼란 틈에도 대한민국의 법통의 안정적 유지를 위하여 부산에서 반국가적 국회의원들을 제압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안정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시행하였다.

1954년 언제 다시 시작될 지 모를 민족 상잔의 위기 속에서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헌법을 다시 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발의 과정에서 다소 산술적 문제가 있었지만 이는 소수점 4이하는 버리고 5이상은 올림한다는 세계적 상식의 문제였기에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1960년 부통령 선거 과정에서 다소 잡음이 있었다. 아직 민주적 시민 소양이 함양되지 못한 일부 선거 관리단이 투표 진행에 소소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기회로 본 남한 침투 종북 세려들의 선동으로 일부 국민들이 폭동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 보위를 위하여 신속히 제압을 시도하였고 이를 4.19 폭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폭도들에게 제압당하여 그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포기하며 대통령에서 하야하게 되었다.

무정부 상태에 도입한 대한민국은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전문 데모꾼들이 양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 경제는 파탄이 났으며 언제 이를 노리고 북괴의 침략이 재현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1961년 구국의 결단으로 박정희 장군은 5월 16일 혁명을 계획하였다. 박정희 장군은 광복군 출신으로 일본 만주군에 위장 입대하여 일본군의 고급 정보를 광복군에게 제공하고 또한 당시 선진 군사술을 보유하던 일본군의 기술을 광복군에게 전수하려 했었다. 오로지 국가 발전을 위한 충정심뿐이었던 박정희 장군은 깊은 고뇌끝에 5.16 혁명을 시행했고 이는 경제 성장과 국가 대통합, 한국식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원과 자본이 부족했던 당시 대한민국이 경제를 발전시킬 방법은 오로지 수출형 산업의 육성뿐이었다. 범세계적 시류에 맞추어 일본과의 극적인 화해를 이끌어낸 박정희 정권은 독립축하금을 일본에게서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는 한국 외교 역사상 가장 실리를 챙겼던 외교 전략으로 평가된다. 저임금 정책을 고수하여 일정 부분의 근로자들의 삶의 질은 개선되는 속도가 다소 더디었지만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 크게 향상되었던 시기다.

사회에 불만을 품은 몇몇 근로자들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중심인 기업의 정책에 과도하게 개입하려 시도하였다.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생산비의 증가로 이어져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였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배후 세력이 의심되는 몇 몇 근로자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하고 국가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된다.

1972년 북괴는 호시탐탐 전쟁을 엿보고 있었다. 김일성은 북괴 내부의 반대 세력들을 모두제거하고 지배력을 확산하고 있는 위기의 시기였다.

이에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국가 개혁으로 평가받는 10월 유신을 거행한다. 종북 세력들을 제거하고 불순 근로자들의 불만이 제거되면서 수출 100억달러의 쾌거를 올리게 된다.

쓰다가 정신이 혼미해져서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