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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탄수화물을 먹어요. 덜 우울할 거에요=
식초 감성을 가득 담은 산성비가 운동장에 물 싸대귀를 내리 갈기 듯 퍼붓는 아침이다. 운동장은 찐득한 진흙탕이 되었다. 내일이었던 체육대회는 다음주로 연기되었다.
주르륵 내리는 식초비에 본능이 불러다 줄 우울함을 느낄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수업 시간 아이들의 축처진 눈빛을 달래주고 싶었다. 수업 시작하자 마자 우울증과 밀가루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있쟎아? 왜 어른들은 그런 말 하쟎아? 비오는 날에 뭐에 뭘 드시고 싶다고 하시니?"
"막걸리에 파전이요!"
합창하듯 답이 나왔다. 성장기의 식탐일까. 강렬한 하모니로 대답했다. 누가 곁에서 보면 애주가로 가득한 탈선 청소년들의 외침으로 보일 것 같았다. 이 분들 진짜 집에가서 막걸리 드시는 것 아닐까하는 걱정은 잠시 내려 놓고 말을 이었다.
"또 엄마가 갑자기 준비하는 음식같은 거 있쟎아? 뭐 먹지?"
"칼국수?"
"그렇지. 파전, 칼국수, 막걸리. 뭔가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뭐냐면 탄수화물이야. 물론 막걸리는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비가 오면 탄수화물이 땡겨. 원래 인간은 말이다. 햇빛을 받아야 돼.
그래서 그 뭐냐..그 세..세...세리..세라......암튼 그건 과학선생님께 여쭤봐. 알쟎니. 뼛 속까지 문돌이쟎아. 암튼 그 뭔가가 보충이 안돼. 그러면 사람이 우울해지거든? 그때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그 세... 뭐시기가 채워진다 이거지."
" 아 배고파요!!!"
"어! 바로 그거야. 그게 정상이거든. 근데 문제는 뭐냐. 학교에 매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 없지? 없으니까 빵이라든가 컵라면이라든가 요런 탄수화물 덩어리들을 섭취할 수가 없거든!
그럼 어떻게 되겠니? 갑자기 팍 기운이 빠지겠지? 가뜩이나 공부하기 싫은데 힘든데 힘이 축축쳐진다 이거지. 그러니까 잘봐. 본능은 그래.
근데 그 본능을 이겨내는 게 그게 또 인간이라 이거지. 오늘 하루 축축 쳐지겠지만, 좀 의식적으로다가 더 힘내고 파이팅 하렴. 많이 힘들지? 힘내"
초임 때부터 주욱 고등학교에만 계속 근무했다. 수험생은 고등학생의 다른 여러 이름중 가장 슬픈 이름이다. 가뜩이나 힘든 수험생활에 날씨가 비가 주륵주륵 내려주면 아이들 언제나 더욱 처진 하루를 보내곤 했다.
비가 오는 날마다 탄수화물이야기를 들려 주며 응원했었다. 올해 새로 만난 H고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비와 탄수화물 그리고 우울한 하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스스로 뿌듯해 했다.
수업 시간 내내 비가 멈추질 않았다. 점심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밥이라도 왕창 섭취하면 아이들 기분이 좀 풀리지 않을까. 오늘 하루 우리 H고 아이들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낼까. 마음이 아팠다.
쉬는 시간 복도를 지나가는데 여기 저기서 괴성이 들려온다. 평소보다 훨씬 더 활기찬 수다 소리가 학교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집단 의식이라도 하는 듯 아이들의 괴성이 식초비의 물 싸대귀 소리를 가볍게 제압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서둘러 담임 학급으로 향했다.
세상 천지에 이렇게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이 또 있을까. 마주 앉아 깔깔깔. 장만해 놓은 게임기 앞에서 껄껄껄. 복도에서 꺄르르륵. 화장실 앞에서 끼룩끼룩.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옆반도 옆옆반도 옆옆옆옆옆옆반도 모든 같은 풍경이었다. 트와이스가 무대에 오른 위문열차 공연장 같았다. 왜 이러지? 자고로 고등학생의 장마철은 우울철 아니었단 말인가. 고등학교 재직 생활 십수년만에 처음으로 목격하는 비오는 날에 즐거움.
댄스 인더 레인.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해 하니 덩달아 나도 너무 행복했다.
마냥 귀여운 아이들을 보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스물 스물 들어왔다.
초등학교 교사 벗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원래 비오면 아이들은 축처지쟎아. 근데 우리 H고 아이들 말야.."
"엥? 뭔소리야? 애들 원래 비오면 더 날뛰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외의 답을 들었다.
"초딩들은 비오면 더 날뛰어. 막 신나가지고. 왜 그런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게 비가 내리면 소리가 울리쟎아. 에코가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애들 비오면 더 날뛰어. 원래 그렇쟎아?"
초딩들은 비가오면 더 날뛰는 것이 디폴트란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헌데 이쪽은 노동가능연령을 훌쩍 넘긴 고딩님들 아닌가. 십수년을 보아온 비오는 날 우울한 수험생들은 죄다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자리로 돌아와 업무 메신저 창을 하나씩 정리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보낸 메시지가 팝업 창에 떴다. 메시지를 읽는 내내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비가 옵니다. 아이들이 복도에서 뛰다가 다칠 수 있으니 늘 안전에 유의하라고 꼭 당부해주십시오. 뛰지 말고 걸으라고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비가 오는 가운데 아이들이 특히 더 소란스러울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복도에서는 정숙하게 보낼 수 있도록 가벼운 훈화라도 부탁드립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어느 학교에서 근무하는 누구인가. 내가 근무하는 이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공강 시간 면학실에 홀로 앉아 곰곰히 창밖의 산성비를 쳐다보며 지난 비오던 날들을 하나씩 복기해보았다. 지난 십수년이 특수한 상황이었던 것인가.
이 차이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H고 애들이 더 순수하기 때문인건가. 다른 고등학교도 비슷하다고 들었던 것은, 또 또 또 뭐란 말인가.
탐정 놀이에 잠시 더 빠지려다 쉬는 시간 종소리와 함께 복도를 다시 뒤흔드는 즐거운 집단 괴성 소리를 듣고 이내 그만두었다. 그냥 나도 즐기기로 했다. 비오는 날 축 처진 아이들을 보며 숨막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하단 말인가.
앞으로 비오는 날에 우울증 극복 프로젝트- 밀가루 훈화는 영원히 써먹을 필요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행복한 비날.
=비 오는 날에는 탄수화물까지 먹어요. 더 좋을 거에요 =